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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 수묵화를 보는 듯한 영화

만달러블로거 2022. 11. 21. 15:20

자산어보
영화 자산어보

하얗게 빛나는 스크린 위에서 먹의 농담이 춤을 춥니다. 이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흑백으로 표현된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제가 영화 자산어보를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인상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선택한 인물은 정약전입니다. 과연 감독은 왜 정약전을 선택했을까요? 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로 떠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준익 감독이 선택한 인물 정약전

우선 주인공이 정약용도 아니고 정약전입니다. 물론 정약전은 훌륭한 선비였습니다. 정조는 정약용의 아름다움보다 정약전의 준걸함이 낫다고 평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유명세로는 정약용에 비하지 못합니다. 그의 저서인 자산어보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잠깐 스쳐가는 정도인지라 인지도가 그리 높지 못합니다. 게다가 조선시대를 다루는 영화인데 흑백이라는 점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습니다. 흑백 영화의 아름다움은 말이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대중적인 요소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감독의 도전적인 자세이고 선택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는가를 통해 그 본성이 결이 드러난다고 합니다.결국 자산어보는 그가 생각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영화는 이준익 감독이 만든 어떤 상업 영화와도 다른 독특한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이 만든 또 하나의 수작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역사 덕후라는 이준익 감독이 아니면 세상 그 누가 정약전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요?

자산어보의 역사적배경

정약전은 정 씨 집안의 내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호는 순암, 자는 천전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그 유명한 다산 정약용입니다. 정약용은 둘째 형 정약전과 오해가 두터웠습니다. 학문적으로도 조언을 주고받는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형과 아우가 서로를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서 둘이 나눈 편지나 후대의 저서에서도 둘의 관계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남인계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1779년에 천진 남이라는 곳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는 모임을 가집니다. 이때 모인 학자들이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같은 이들과 정약전 정약용입니다. 5년 후에는 이승훈이 조선 최초로 베이징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기에 이릅니다. 이들이 천주교를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조선은 역사상 최초로 선교사 없이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놀라운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실학을 연구하던 남인계 학자들에게 서학이나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고 해석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천주교의 진리 탐구를 학문적으로 해석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 천주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유일한 학문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올바른 학문이자 진리의 사상 체계가 있는 조선에서 다른 학문은 그저 사학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정조 역시 천주교를 박해했고 천주교회 신자들은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박해는 정조의 박해가 아닙니다. 정조는 1800년에 사망하고 이후 순조가 즉위합니다. 나이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순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벽화와 결합해 정조 시대의 세력을 이뤘던 남인들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즉 영화의 신유박해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의도로 시작된 박해이며 그 타깃도 명확했습니다. 그래서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를 떠나게 되는 겁니다. 정약종은 순교하고 약전과 약용은 배교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되었다는 게 역사의 설명입니다.

유배지 흑산도에서 살아가는 정약전

이준익 감독이 주시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흑산도에서 살아가는 정약전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도착해 마을 사람들의 삶에 동화되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는 어류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천주쟁이라는 세상의 평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두고 자신이 세상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선비의 바람직한 자세 그 자체입니다. 정약전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의문을 이준익 감독은 참으로 다채롭게 그려냅니다. 정약전은 언뜻 천주쟁이입니다. 일반적인 천주교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간혹 조선의 선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주교의 교리나 성경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융합을 이루어낸 겁니다. 정약전은 조선시대의 천재적인 선비 중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능히 그런 경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정약전은 자신이 지닌 사상을 조선이 품을 수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고작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정약전이 그 마음의 품은 파격적인 뜻을 말하는 순간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즉 정약전은 시대를 잘못 만난 혁명가입니다. 혁명의 씨앗이 없는 세상에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입니다.

서로의 스승이 되어준 정약전과 창대

그리고 정약전은 창대를 만납니다. 이 창대라는 인물이야말로 영화 자산어보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정약전의 저서 자산어보에서 창대라는 이름은 총 9번이나 인용됩니다. 창대는 글 읽기를 좋아하는 청년입니다. 창대라는 청년은 영리하고 성격이 조용합니다. 그는 정밀해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 성질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 소개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준익 감독은 이 부분에서 정약전의 선비로서의 위대함과 고결함을 읽어냅니다. 당대의 선비이자 학자인 정약전이 천민에 불과한 창대의 이름을 아홉 번이나 인용합니다. 학자로서의 양심과 자세가 매우 고결한 것입니다. 그 부분에서 정약전의 인간미를 읽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창대와 정약전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거래 관계이기도 합니다. 물고기의 지식을 알려주는 대가로 글공부를 가르쳐주기로 합니다. 창대가 이해하지 못한 구절을 알맞은 예시를 통해 이해하게 해 줍니다. 그런 약전의 모습에 창대는 감탄에 맞이 않습니다. 하기사 정약전은 그 대단한 정약용보다도 낫다는 말을 들었던 조선시대 학자 중에서도 초 엘리트입니다. 창대의 과외 선생으로는 과분할 정도입니다. 둘의 갈등과 회복 그리고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큰 깊이가 느껴집니다. 특히 창대가 약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점차 발전해가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영화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창대는 정약전의 위대함을 잘 알고 이토록 훌륭한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그토록 많이 배워 위대한 사상을 갖춘 스승이 세상을 위해 그 재능을 쓰지 않고 물고기 책이나 적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약전은 그런 제자에게 내가 바라는 세상은 임금도 양반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나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일러줍니다. 창대에게 약전은 뛰어나지만 괴짜인 스승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런 창대가 흠모한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가끔씩 편지를 전달하러 가서 만나는 약전의 동생 정약용입니다. 거침없는 성격인 약전에 비해 조용하고 품이 있으며 인자한 약용의 모습에 반한 창대는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심취합니다. 목민심서의 길을 걸으리라 결심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혀서 세상을 이롭게 하고 뭔가 바꿔 나가겠다는 뜻을 세운 겁니다. 이때 창대를 향해 앞서 했던 정약전의 대사가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습니다. 외울 줄밖에 모르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망친 이들이 결국 위에 있는 위정자들인데 그들은 외우기만 하는 공부만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근시안적인 태도가 결국 나라를 망쳤다는 말입니다. 이준익 감독은 정약전의 입을 통해 세상을 지금의 위정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외우기만 하는 공부로 정치인이 고위 관료가 된 그들이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라 비판하는 듯합니다. 창대는 그런 약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창대의 부푼 꿈이 무너지다.

 창대는 그 외우기만 하는 공부로 목민심서의 길을 걷습니다. 창대는 아버지 장진사를 찾아가고 장진 사의 도움으로 과거에 응시하기에 이릅니다. 창대는 원래 장진사의 아들이지만 서자 아니 정확히는 얼 자처럼 보입니다. 장진 사는 그 창대의 글 공부가 높다는 것을 알고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창대는 뛰어난 실력으로 진사실을 통과하지만 대과에는 실패합니다. 실력으로는 대과에도 무난히 급제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이후 나주 목사의 말에 의하면 대과는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의 세력 다툼이라고 합니다. 사실상 신분이 바탕이 되어도 배경이 탄탄하지 않으면 대과에 급제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장진사는 얼마든지 벼슬을 사면 된다고 말합니다. 공명첩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렇게 작은 장진사가 된 창대는 세상을 바꾸고자 합니다. 창대가 만나는 것은 지극히 차갑고 상대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아전들이 나라를 좀 먹고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군포를 매기는 기상천외한 짓을 하는 통에 백성들의 삶은 점차 궁핍해집니다. 나주 목사와 아버지 장진사는 매일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전들도 기생집에서 술에 고기에 기생을 끼고 노는데 익숙합니다. 백성들 천민들을 쥐어짜서 양반들만 누리는 이 기막힌 세상의 구조에 목민심서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 내립니다. 백성들은 군포를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매기는 현실에 항의하고 온몸으로 저항합니다. 이를 본 창대는 그 아전을 두들겨 패기에 이릅니다. 이준익 감독은 자신이 애써 걸어와 진사가 되고 양반들의 세계에 들어갔음에도 그걸 포기하는 분노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창대의 분노가 향한 곳이 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창대의 분노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쯤 비켜서 있습니다. 창대의 분노가 향했어야 하는 곳은 아전이 아니라 창대의 뒤에 서 있는 나주 목사와 장진사입니다. 하지만 창대는 그런 분노를 터뜨리지 못하고 아전에게 매질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약전과 창대의 영화입니다. 정약전은 몸이 흑산도에 갇혀 있지만 그의 정신은 자유롭습니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 글을 썼고 세상을 위해 살았습니다. 반면 창대는 몸이 자유롭지만 그의 정신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출세를 해서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